성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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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25일 김성수열사 기념사업회를 창립하면서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서는
그날까지 '김성수열사를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해 마음의글을 적어보았습니다. - 2001년 3월 -

가슴으로 하는 약속 - 이 언 빈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고, 나무마다 푸른 눈을 뜨는 봄이 왔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도 견디고 나무들은 푸른 손을 하늘 쪽으로 내민다.
계절은 어김없이 철마다 옷을 갈아 입는데,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돌아와 우리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이름들이 있다. 살아서는 아름다운 꽃이었고, 죽어서 더욱 향기로운 꽃들이 있다. 지난 세기 가난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과 노동해방을 위해 목숨을 사른 거룩한 분들이 이 땅의 봄을 진정으로 피워 올리는 것이다.
김성수, 그의 죽음은 먼 바다로부터 우리에게 왔지만, 죽어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하고, 우리를 다시 전선에 당당하게 세우는 힘이 되고 있다. 강릉의 민주화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그의 진정한 부활을 우리는 피워내야 한다.

기념사업회를 준비하며 - 김재관

우리는 "성수"로 상징되는 시대의 암울함과 싸워온 사람들입니다.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헌신과 열정을 사랑하고, 그 어떤 권위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시대의 암울함을 헤쳐낼 이념과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젊은 날 우리가 가졌던 맑고 서릿발 같은 정신이 조금이나마 퇴영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성수기념사업회는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그 어떤 권위나 폭력에도 무릎 꿇지 않았던 시대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합니다. 그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부둥켜 의지하는 둥지가 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서는 그날까지 '성수'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행동하고자 합니다.

인권의 무시와 경멸은....- 최승룡

제 책꽂이에는 세계인권선언문이 꽂혀 있습니다. 부족함이 많지만 나름대로 인권에 대한 관심을 잊지 말자는 생각에서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인권의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유린하는 만행을 초래하였으며, 사람이 언론과 양심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의 도래는 모든 인류의 최고 이상으로서 선포되어 있고∼"

우리는 오랜 세월 "인권이 무시되고 경멸받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도 모릅니다. 올 1월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있었던 12박 13일의 인권활동가 연합 단식농성을 정부가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TV화면을 통해 보면서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었음을 가슴아프게 느낍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맞서다 산화해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김성수 열사를 비롯한 적지 않은 열사들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본 성수 - 정종호(서울대 지리학과 84학번)

성수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삶의 문제에서는 진지했다. 입학 후 "철학인의 모임"이라는 지리학과의 사회과학 학회에 들어왔다. 부담가는 내용의 사회과학 서적들과 심각한 대화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떤 이들은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임에 빠진 적이 없었다.
성수가 먼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형, 저 연극에 관심이 있는데요." 그를 연극회에 데려다 주었다. 얼마 지나서 그가 연극회의 공연에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연극에 나오기 전에, 수유리 4.19 국립묘지에 같이 간 적이 있다. 서울의 남쪽에서 북쪽 끝으로 버스를 타고 한시간을 넘게 갔다. 서울의 산중턱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판자촌들. 빈민촌의 삶에 대해 나도 들은 바를 얘기했다. "방 한 칸에 삼대가 살기도 한 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4.19 국립묘지에서 광주와 민족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야기들은 구호가 되고 수천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로 내달렸다. 곧이어 발광하며 터지는 지랄탄과 최루탄. 너무 매워 눈마저 감기지 않았고 숨이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최루탄 먼지가 가라앉고 나서 그가 말했다. "독재타도, 민족자주를 학생들만 외치는 게 아닌가봐요."
시대의 탁류 속에서 그를 잠시 잊고 있었다. 연극회 친구의 말이 동아리 방에서 주로 지낸다 했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던 그가 교련시험에 불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황했고, 부산 앞바다 변사체로 신문에 나타났을 때 가슴이 아팠고, 관계기관의 음모가 배어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분노했다.
80년대의 삶이 너무 버거워 군대로 도피하고 싶었던 나를, 성수는 몇 번이고 다그쳤다. 시대의 아픔과 역사의 부름에 모른 채하지 말라 했다.

조국을 위하여 - 이요한

안녕하세요?
저희는 강릉에서 자주 민주 통일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킬 파릇파릇한 청년들입니다.
5.18광주순례, 청년통일캠프, 2천년통일대축전 강릉청년준비위 활동 등 1년간의 준비운동을 거쳐 많은 분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2000년 10월에 준비위로 태어났지요.
이제 조만간에 정식 창립을 하게 될 거구요 2001년 2월에 결성된 청년회 전국조직인 '한국청년단체협의회'와 쌍둥이 나이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청년회내에는 정보통신, 문학, 풍물 등 청년들의 다양한 관심과 능력에 따른 소모임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과 건강한 고민을 하고 어울리기 위해 문을 활짝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지요.
'청년'을 가르는 기준은 육체(연령) 보다는 마음가짐입니다. 故 문익환 목사님은 가시는 그날까지 청년으로 살았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바치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우리가 개척해갈 21세기는 청년다움이 넘치는 자주와 민주, 통일의 새세기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끝장내는 싸움부터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가까운 몇해안에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마칠 때까지 언제나 나무처럼 산맥처럼 우뚝 서있는 강릉청년이 되겠습니다!!

먼저 김성수열사 기념사업회... - 배 재 국

먼저 김성수열사 추모사업회의 재건을 준비하시는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학교의 집회장에서, 거리의 투쟁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의지를 북돋아 주시고 어깨를 다독거려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점점 침체되어 왔던 성수형추모제가 이번 추모사업회 건설준비로 지역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다는 소식에 너무나 마음이 들뜹니다.
국민의 정부라 자칭하는 김대중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의 독재정권에서는 말도 꺼내기가 힘들었던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던 열사들… 이제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으나 이 성과들은 열사들의 유가족들과 민족민주세력들의 투쟁의 산물입니다.
열사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약속했던 현정권과 진상조사위 또한 그 진행상황 속에서 분명한 한계가 표출되고 있습니다. 열사들의 의문사뿐만 아니라 모든 민주열사들에 대한 명예회복, 피해배상 이것은 정치세력이 아닌 애국민중의 더욱 발전한 활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이고 척박한 강릉지역에서 그 역할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김성수열사 추모사업회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추모사업회가 지역의 흩어져 있는 인자들을 활동의 공간속으로 모아내어 지역활동의 중심이되고 그동안 너무나 힘겹게 싸워 오셨던 성수형 부모님께 큰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길에 제 조그만 힘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강릉대학교 민주동문회에서도 힘찬 연대의 의지를 보냅니다.

사인규명 촉구집회... - 안병화

안녕하십니까?
저는 민족관동대학교 졸업생 동문 대표 안병화입니다.

1988년 처음으로 강릉지역에서 김성수 열사 사임규명 촉구 집회를 가졌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어려운 당시의 강릉지역 학생운동 상황속에서 적은 인원이었지만 김성수 열사 의문사 사인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처음으로 투쟁의 단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 고인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 많은 선후배와 지인들이 함께모여 추모사업회를 꾸린다는 연락을 받고 많은 반성과 미안한 마음을 금할길 없습니다.
아무쪼록 아직은 미약한 저희들이지만 추모사업회 건설과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희 관동대학교 동문들은 지난 1994년 처음으로 동문 모임을 갖었으나, 당시 몇몇 동문들이 조직사건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1999년 12월 4일 김성수 열사 어머님을 모신 가운데 처음으로 30여명의 동문들이 모여 송년의 밤을 함께 하였고, 동문 게시판(www.talktalk.net 제목 : 관대 디딤돌)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0년부터 각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문들의 연락처를 파악하고 주소록을 만들면서 민주동문회 건설의 기반을 다지고 있으며, 짧은 기간내에 여러 선후배님들게 부끄럽지 않은 동문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결과의 하나로 지난 2000년 송년의 밤 모임에는 대략 50여명의 졸업생 동문들과 재학생들이 함께하였으며 대략적인 모임의 체계와 목적을 함께 결의하였습니다.

아직은 참가하고 있는 동문들보다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동문들이 다수지만 연락처를 파악하고 좋은 동문사업을 만들어 간다면 반드시 젊음을 강릉지역에서 그리고 민족관동대학교 교정에서 함께했던 많은 종문들이 모여 들것이며 동우회 수준이 아닌 각학과 단대의 체계를 갗춘 민주동문회가 건설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강릉대학교 동문들과 그리고 강릉지역 선후배님들과 함께 저희 민족 관동대학교 동문들이 강릉지역에서 함께 어울릴 그날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약속드립니다.

김성수열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최영순


성수형이 세상을 떠난 지 만 15주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이 우리 어머님, 아버님의 힘으로 99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진상조사로 성수형을 죽였던 자들에게 칼날 같은 처벌을 내리고 이 땅에서 다시는 의문사라는 어이없는 죽음이 없도록 투쟁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기념사업회 홈페이지는 전반적으로 형이 추구했던 자주, 민주, 통일의 세상을 여는 파발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작 중에 있습니다. 형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점, 그리고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할 어머님, 아버님의 글, 기념사업회에 대한 소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 등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원들에게 형이 펼치려 했던 세상을 가장 빨리 알려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든 상시적으로 접속해서 추진상황을 알려내고, 우리가 단결해서 할 수 있는 투쟁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그런 투쟁의 공간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해갈 계획입니다.

이 공간은 관리자 한 두 사람이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원여러분의 관심과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진정한 진상규명을 이룰 수 있도록 투쟁하자구요!!!